'한국 사망증명서'에 날인’/을사늑약 후 제일 먼저 조선을 버린 나라? | ||||||||||||||||||
카쓰라 - 태프트 밀약의 교훈/전쟁기생국 일제를 바로알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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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협정 무효화를 위한 국민행동 준비위원회'는 2011.8.16 프레스센터에서 발족식을 갖고, 1910년 한일합병 국치조약과 1965년 한일협정을 무효로 하기 위한 실천에 나선다고 밝혔다. 준비위는 "박정희 정권이 대일 굴욕외교 끝에 체결한 한일 기본조약과 여러 협정은 일본의 후안무치한 역사 왜곡을 묵인하고 방조한 결과"며 "군부독재의 모욕적 유산인 한일협정을 무효로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주장했다. 때문에 이 모임이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를 겨냥한 단체가 아니냐는 관측도 있다. 이부영 대표는 "(한일협정 체결 후) 46년이 지났어도 일본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태도는 식민통치 시대로 되돌아간 느낌"이라며 "내년 (대통령) 선거에서 정권을 담당할 세력에게 한일협정 문제에 대한 의사를 물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날 발족식에서 여권 인사로는 이재오 장관이 유일하게 참가해 눈길을 끌었다. 이 장관은 "지난 시절 가난했고 독재치하에 민주화가 급했지만 이제는 국력에 걸맞게 한일관계를 정리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장관은 한일수교 반대운동에 앞장섰던 학생운동권 모임인 '6ㆍ3동지회' 회장 자격으로 준비위에 참여했다. 역사를 바로 세우기 위한 순수한 외모이지만 속에는 이미 정치권력 투쟁이 벌어지고 있음이 감지된다. ‘박정희 청산’을 부르짖으며 한나라당 내 박근혜 청산을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것 같다. 대한민국 국민이면 누구나 한일협정과 한일강제병탄조약 무효를 주장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정부의 장관이 시민단체 모임에 유일하게 참여하여 그 순수성을 훼손하는 것은 또 다른 역사의 죄를 짓는 것이다. 장관은 국민이 위임한 정부를 대표하는 사람이기에 국민의 이름으로 일본에 공식적인 요구 및 정부 내 정책 입안과 집행을 통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역사가 왜곡된 뿌리를 찾아보면 정권세력들의 변절과 조국을 팔아 사리사욕을 챙겼던 데서 비롯됨을 알 수 있다. 누가 대통령이 될 것인지는 국민의 선택이다. 그러나, 역사를 팔고 역사를 이용하여 정치권력을 장악하려고 하는 것은 안된다. 국민운동은 국민에게 돌려주고 장관은 국가의 지도자답게 당당하게 공권력을 가지고 외교정책을 펼쳐주기를 바란다. 조국을 팔고 민족정신을 말살한 굴욕 한일협정은 반드시 폐기되어야 한다. (편집자 주)
1904년 일본이 도발해 일어난 러일전쟁은 영일동맹과 미국의 일본지원이란 영미 양국의 후견과 배려를 배경으로 일본제국이 러시아와 대결한 것이었다. 결국 영미 양대 제국을 위한 대리전쟁을 한 것. 당시 일본의 승전이라고 영미가 손을 들어주었지만, 실제로는 전사상자의 수와 병력손실이나 국력의 한계로는 일본이 더욱 위기상황에 몰렸었다. 제정 러시아에 국내위기인 혁명발발과 군내의 부패와 그로 인한 비능률과 작전실패가 일본을 살린 것이다. 그 당시 미국은 포츠마츠 강화조약을 주선하면서 일본제국과 한국문제를 두고 밀약을 맺어 한국이 식민지로 전락하는 것을 방조했다. 미국은 스페인전쟁으로 영유케 된 식민지 필리핀의 안정확보를 위해 일본의 보장을 받아내는 대가로 한국이 일제식민지가 되는 것을 인정했다. 이른바 ‘카츠라(桂太郞 가츠라 타로 일본총리)-태프트(미국무장관)밀약’이다. 그것이 밀약의 내막이고 그래서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미국은 가장 먼저 인정하고 한국에서 외교공관 철수를 제일 먼저 단행했다. 우리 정부와 고위관료는 그것도 모르고 미국에 희망을 걸고 발버둥질했다. 일제강점 하에서 1919년의 윌슨 미국대통령이 파리 강화회의에서 민족자결주의를 선포하자, 다시 기대를 걸었다. 물론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아시아 민족의 민족자결은 아니었다. 그것은 당시 파리에서 윌슨에게 청원했던 베트남의 청년 호지명도 알아차렸었다. 그렇다고 우리가 새삼 미국에게 섭섭하다는 감상을 피력하는 것은 아니다. 국제관계는 그 당시나 지금이나 세력관계로 힘이 작용하고 각기 자기나라의 이익을 기준으로 처리된다는 실상을 확인하자는 것이다. 미국은 우리의 ‘혈맹’이 아니다. 그 이상으로 우리의 할아버지라도 미국의 이익을 저버리고 한국을 동정하지는 않는다. 그런 것을 기대하거나 미련을 둬온 멍텅구리 때문에 우리는 해방 이래 나라를 망쳐왔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승인을 거부한 미국! 일본의 진주만기습으로 미·일간에 전쟁이 발발했을 때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도 대일선전포고를 하고 미국 등 연합국 편에 서서 공동전선을 폈다. 그러나 미국은 일본이 패전할 때까지 우리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았다. 교전단체 정도로도 공식인정하는데 인색했다. 일제 패전 후에는 임시정부의 공적기관으로 귀환하는 것도 거부하고 개인자격으로 입국을 허용했다. 그러한 사정은 미국 나름의 이익을 추구하는데 있었다. 그것이 국제정치 현실이었다. 해방 후 한국주둔 미국군은 군정통치에서 일본총독을 고문으로 대우하려했고 친일파를 전면적으로 기용했으며 한민족이 일제전범처리는 물론 한국인 반역자 처벌도 못하게 했다. 북에 진주한 소련군이 그들 독자노선을 걸어간 것도 물론이다. 그러니 미소공동위원회는 우리 민족 스스로가 미국과 소련을 납득시키고 압력을 가하지 않으면 그들 각자의 이해 때문에 두 쪽으로 쪼개질 것은 뻔했다. 여기서 우리는 당시 우리 지도층의 국제감각에 대한 나이브(천진난만)함과 그 대응자세의 미숙성을 가슴 아파 할 수 밖에 없다. 미국의 한국정책은 패전국 일본에 대한 것보다 부실! 미국은 일본패전이전에 각 부처 합동으로 일본민주화를 위한 정책을 개발하고 있었다(3성통합특위). 한국에 대해선 포츠담-카이로 선언에서 ‘노예적 상태’로부터의 해방을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구체안이 없었다. 친미주의의 대부격인 이승만이 미국첩보국(OSS)에서 대령대우를 받으며 활약했으나, 그의 건의가 반영된 흔적은 없다. 미국 당무자는 한국을 필리핀 정도로 생각하여 50년 정도 식민지로 개화시킬 수 있다는 막연한 생각이었는지 모른다. 미국은 소련과 영국 등 3개국 모스코바 삼상회의의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 결정과도 무관하지 않다. 물론 한국에선 전적으로 소련의 제기라고 알았지만 말이다. 그 뿐인가?
미국은 일본에서는 일본정부를 감독해 민주화개혁을 대대적으로 추진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영어를 공용어로 하는 미국의 군사통치를 시행해 무수한 시행착오를 일으켰다. 이른바 ‘통역정치’의 시대가 친일파지배의 시대와 함께 도래하도록 했다. 그 정도는 감수할 수밖에 없다고 치자! 미국은 일본 전범재판에서 침략시기를 일제관동군이 1928년 장작림 만주군벌에 대한 폭살사건 시기부터 따졌다. 한국 침략문제는 애당초 빼버렸다. 그래서 후일 일본 국수주의자는 물론 일본정부가 한국을 침략·강점한 것을 인정치 않았다. 다음에는 전범재판에서 일본의 침략에 의한 가해행위의 최대 피해자인 한국인 대표를 참관자로서도 초정하지 않았다. 필리핀과 인도네시아, 버마와 인도차이나가 당사국으로 등장하는데 말이다. 이것은 전적으로 미국이 일본 측의 의도를 묵인, 아니 의도적으로 인정한 것인 아닌가? 이 점에 대해선 우리가 1948년 정부수립 직후에 미국과 일본에 문제를 제기했어야 한다. 또 하나 엄청난 사실이 있다!
1951년 일본이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체결할 당시에 한국은 초청당사국에서 제외됐다. 그 제외내막을 보면 그것은 당시 일본의 조약국장 선에서 이루어졌다(당시 조약국장 니시무라 구마오(西村熊雄)의 회고담, 말하는 昭和曆史,(3)아사히신문(아사히문고)1990년, 니시무라의 글, 講和條約,303쪽 이하). 더욱 한심스러운 것은 그래놓고 일본과 미국은 동 강화조약 본문조항에서 한국문제 처리조항을 설정했다. 우리 정부 사전 양해도 없이. 그야말로 주권침해이다. 당시의 이승만 정부는 그에 대해 한마디 말도 없었다. 그리고는 1965년 한일국교 타결의 한일기본조약에서는 우리가 그 조항을 인정하는 조항을 슬쩍 끼워 넣었다. 박정희정권의 친일매국의 작태는 한일조약을 일제침략사실을 묵인한 것이다. 이 조약은 강화조약도 아니고 그렇다고 통상조약이라고도 할 수 없다. 박정희정권이 민족을 배신한 양보를 해서 우리의 국익과 동포형제의 권익을 팔아먹었다. 이를 알면서도 방임 내지 조장한 것은 미국이다. 아무리 나라마다 국익이 있다고 해도 여기까지 오게 되면 우리도 무엇인가 할 말을 해야 한다. 한일협정(1965년)은 다시 검토되어야!
1995년 한일협정체결 30주년을 맞아서 동 조약을 재검토해야 한다는 운동이 일어났다. 나도 그 조약의 문제점에 따른 개정초안까지 마련해서 제시했다. 2000년에는 일본시민단체 초청으로 그 내용을 일본에서 발표까지 했다. 김대중 대통령도 1998년 일본 기자단과의 회견에서 개정의견을 제기했었다. 물론 당시에 한일굴욕외교의 장본인으로 스스로 ‘제2의 이완용’을 자처한 김종필이 총리로 있었기 때문에 묵살되었다. 8·15경축사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과거청산의 촉구와 한일관계의 문제를 재검토할 것을 공표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외무부장관이나 주일한국대사란 이들이 딴 소리를 하고 했다. 그들 정체가 무엇인가? 어느 나라의 관리인가? 지금 한일협정 관련 문서가 공개되고 과거사가 규명될 시점에 이르러서 일본의 극우는 일본 군국화에 지장이 있을까봐 현 정부를 못마땅해 한다. 한국의 수구 친일파부류는 한국정부의 개혁의 주장자를 친북·용공·좌경으로 몰아붙여서 그들의 추악한 정체와 과오가 드러나는 것을 막으려고 한다. 미국과 일본의 입장과 한국! 우리정부는 미국과의 관계에 대해 국민감정을 거슬리면서까지 최대한 배려해 왔다. 지금도 그렇다. 그런데 미국의 꽁무니에 붙어서 최대의 이득을 노리는 일본정부나 일부 일본의 우경 군국주의부류는 대북강경책으로 몰아붙이기를 하며 한반도긴장상태를 조성하려는 듯한 오해를 살 일을 계속해 자행하고 있다. 미국의 입장은 미국이 일본제국을 앞장세워서 한국개방을 시도한 19세기 운양호사건 당시를 연상케 한다. 당시 미국은 일본의 한국원정함대를 격려·지원해 1853년 미국 페리제독함대의 ‘일본원정기’를 제공하고 함포협박외교의 기술과 전술을 일본에게 지도 자문해줬다. 카츠라-태프트 밀약이 있기 반세기 전의 일이다. 이후 일본은 영미제국의 그늘에서 컸다. 그래서 지금도 일본 구군국주의자와 극우는 일본이 해양국가인 미국과 영국 편에 서야한다는 지정학적 전략론을 오카사키를 대표주자로 해 제기하고 있다(오카사키 히사히코, 戰略的 思考란 무엇인가? 日本中央公論社.) 일본은 2차 대전 패전 후 한국전쟁에 기생해서 졸부가 되었다. 한국전쟁당시에 한국군대용 차량으로 일본의 도요다자동차가 쏟아져 들어 온 것을 잊을 수 없다. 왜 잊지 못하냐 하면 부실제품이어서 부딪히고 고꾸라지면 못쓰게 되어 버려지는 차량이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이후엔 1960년대 월남전에서도 마찬가지 이득을 챙기는 ‘전쟁기생국’이 되었다. 오키나와는 일본본토의 군수병참기지화는 한국전 당시 못지않게 활발한 경기를 구가했다고 할까?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이 최근 열람을 허용한 중앙정보국(CIA)및 국무부의 기밀해제 문서를 통해 밝혀진 내용이다 일본주재 미국 대사겸 더글러스 맥아더 연합군 최고사령관의 정치고문이었던 윌리엄 J. 시볼드는 일본 경제가 한국전쟁으로 뜻하지 않은 소득을 올렸다고 말했다. 그는 "일본 경제는 향상됐고 계속 향상되고 있다"면서 "한국전쟁으로 유엔이 일본에서 대부분의 물자들을 구입하는 바람에 일본이 필요한 외화를 얻을 수 있게 됐다는 점에서 한국 전쟁은 일본이 '횡재(windfall)'하도록 해줬다")
이미 일본 자위대(自衛隊)란 군대는 1963년 ‘삼시작전(三矢作戰)연구’란 비밀 가상작전도상연습을 한 것이 폭로되고 있다. 이 작전에선 한반도 유사(有事 -전시란 말을 교묘하게 돌려쓰는 일본식 표현)시를 가정해서 한국군이 반란 시에 어떻게 대처하는가 하는 작전까지 나온다. 그 후 일본자위대는 미국과의 긴밀한 유대 연합체제가 되어 있다. 지금 일본정부는 이라크에 출병해 일본 독자의 평화협력체제를 갖추고 있다고 국민을 달래고 있으나, 실제로는 군함함정으로 미국전함에 대한 급유와 공군에 의한 미국군대의 군수물자 수송을 담당하고 있다. 육상자위대(육군)도 공공연히 전투만하지 않을 뿐 사실상 전투배치 상태 하에 기본대비와 전투태세와 훈련에 돌입한 것이 아닌가? 그래서 평화헌법을 개정해 전력보유의 합법화와 전쟁국가체제로 전환하려는 숙원을 풀려고 안달이 난 것이 아닌가? 이미 1990년대 우경화무드를 타고 전시법제는 정비되어 해외파병에 이른 것이다. 한편 미국은 한국전쟁 이후부터 일본의 재무장을 촉구해 온 것이기 때문에 미국의 적극지원과 협조 하에 있다. 여기서 우리는 1965년 한일협정 당시에 미국 측이 가한 한국에 대한 압력을 악몽처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국익에 앞서서 미국과 일본의 국익이 우선될 당시의 우리 정부라는 군사정권의 작태를 보면 말이다. 그런데 박정희 등 군정으로 부자 되고 출세한 무리는 무조건 잘된 것이라고 떠들어 댄다. 나는 그들에게 월남전 전사자가 묻힌 국립묘지에 한 번이라도 가서 눈물을 쏟고 가슴을 쥐어뜯어 봤냐고 물어본다. 여기서 우리는 어느 나라에 엎드려 빌어도 그 나라가 자기의 국익을 희생하고 양보할 것을 기대할 수는 없다. 그러나 사태의 정확한 파악과 의연한 대처로써 자기의 입장을 분명히 해서 스스로를 지켜가려는 각오를 해야 한다. 아무리 ‘혈맹’타령을 해서 짝사랑의 춘정을 하소연해도 그것으로 일이 풀리는 것은 아니다. 그런 꿈에서 깨어야 한다. (글 : http://cafe.daum.net/daumtokdo) |
출처 : 한류열풍 사랑
글쓴이 : 단 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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