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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젊은세대들은 잉여문화를 선호하는가

뉴 턴 2011. 9. 25. 13:19

왜 젊은세대들은 잉여문화를 선호하는가

<김헌식 칼럼>잉여짓, 잉여문화 그리고 청년의 통과의례
김헌식 문화평론가 (2011.09.25 09:32:37)




잉여는 혼란스럽다. 좋다고도 나쁘다고도 할 수 없다. 일단 잉여는 사전적으로 ´남는, 넘치는´ 이라는 여분의 뜻을 가지고 있다. 잉여생산물은 풍족한 생산량을 의미한다. 그러나 잉여가 많으면 생산설비 일부는 쓸모가 없어진다. 잉여장비의 발생이다. 잉여생산물은 소비자에게는 여유를 제공하지만, 생산자에게는 고통을 줄 수 있다. 잉여인력은 노동력을 제공하는 노동자에게는 고통을 주게 된다. 잉여인력이 많은 사람에 비해 일자리가 적은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일자리가 없을수록 노동자는 불리하고, 일자리를 통제하는 고용주는 유리해진다. 

잉여인간이 되는 것은 바로 이런 생산과 그것에 대한 쓰임에서 부적격자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즉 쓸모가 없는 인간이 잉여인간이 된다. 생산에 쓸모가 없는 인간, 이는 실업자를 말한다. 한동안 사라졌던 잉여라는 말이 젊은이들 사이에서 널리 회자되고 있는 것은 이런 사회적 맥락 때문이다. 
그런데 본래 잉여인간은 지식인들의 자조감에서 나온 단어다. 

노동자들은 노동을 통해 생산물을 만들어내지만 지식인들은 현실에서 만들어내는 것이 없어 보인다. 생산에 참여해보고 싶어도 산업사회의 생산시스템에서 그들은 별로 할일이 없는 한량으로 보인다. 생산 공간이라는 현실에서 필요하지 않은 인력이 지식인이라는 자괴감이 작용한다. 그러나 지식정보화의 담론이 많아지면서 이러한 자괴감은 어느 정도 사라졌다. 그 사라졌던 잉여인간이 잉여짓, 잉여문화로 다시금 대학생들 사이에서 널리 회자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쩌면 그것은 지식인의 고민과 맞아떨어지기도 한다. 지식인의 고민이 대학생들에게도 확장되었다. 배운 지식은 많고 자의식은 강해졌는데 생산에 참여하고 싶어도 참여하지 못하는 것이 대학생들이다. 취직난으로 모두 고용시장에서 잉여인력이 되어가고 있다. 그들은 지금까지의 모든 행동들이 잉여짓이 될 가능성이 많은, 그 불안 속에서 생활한다. 엄청나게 열심히 살아왔지만 그것들이 모두 잉여짓에 불과할 확률이 높다는 공포 심리도 있다. 생산의 어느 곳에서라도 주체가 되고 싶지만 주체가 될 수 없는 상황에서 잉여는 부정적이다. 

그러나 앞서 잉여는 혼란스럽다고 했다. 따라서 부정적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잉여짓을 하지 않고는 이 상황을 감내할 수밖에 없다. 이 잉여 짓 속에서 희망을 꿈꾸는 것만이 유일한 대안이다. 잉여짓을 그만둔다면 삶의 희망도 현실을 견뎌낼 수단도 사라진다. 이는 잉여가 문화와 밀접하다는 점을 생각하게 만든다. 문화예술은 잉여 짓이 없으면 탄생할 수 없다. 

어느 자수성가한 집안에 교수의 딸을 며느리로 맞았다. 그 며느리는 글도 쓰고 텔레비전이나 이따금 출연했다. 시어머니는 그런 며느리에 대한 경외감이 있었다. 아이를 맡기면 마다하지 않고 보아준 이유였다. 하지만 그런 경외감은 아파트 단지의 같은 동, 아래 위층에 살면서 깨졌다. 며느리는 시어머니가 보기에 매일 빈둥거리고 있었다. 

며느리는 소파에 누워 텔레비전을 멍하게 보거나 인터넷 서핑으로 시간을 보냈다. 이리저리 왔다갔다가 하는가 하면 바닥에 누워 뭉그적거리기도 빈번했다. 한마디로 빈둥거리기가 일쑤였다. 그런 일들이 있은 뒤로 시어머니의 태도는 싸늘해졌다. 아무 쓸모없는 짓만 하면서 아이나 맡기는 며느리가 괘씸하기만 했다. 하지만 그 며느리의 글이나 방송 출연은 열정적이고 창조적이었다. 

시어머니가 만약 잉여와 문화예술 창작의 관계를 알았더라면 변심은 없었을지 모른다. 잉여짓은 창조행위다. 당장에는 의미와 가치가 없는 행위인 것 같지만 그 속에서 엄청난 새로운 대안이 도출되기도 한다. 창조에는 잉여의 시간과 공간이 필요하다. 비어야 채움이 있고 쓸모가 있다. 생산만 생각하면 생산이 되지 않는다.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사람들의 행동은 모두 잉여적이다. 기존의 관점으로는 쓸모가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기존의 사회시스템에 부합하지 않는 것도 잉여적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 잉여적인 것은 새로운 사회를 여는 단초가 된다. 청년기는 잉여기이다. 그들의 행위는 잉여짓이고, 거쳐 가는 의무적 과정이다. 당장에 그들의 행위를 쓸모 있음 없음으로 평가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언제나 청년은 잉여짓을 통해 새로운 대안을 만들고, 자신의 입지를 구축하며 사회를 만들어 나갔기 때문이다. 그것이 축적되어 온 것이 바로 인류문명이다. 다만 잉여짓도 치열하게 해야 한다. 잉여를 잉여적으로 할 때 잉여문화의 긍정성은 부정성으로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글/김헌식 문화평론가


출처: http://www.dailian.co.kr/news/news_view.htm?page=&code=6&gubun=column&id=2615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