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적인 배분과 공정한 분배:농장일꾼 역설, 존 베이츠 클라크, 한계 생산성 보상이론
시장은 배분에 효율적이라고 말해진다. 사람들이 원하는(수요 하는) 곳으로 자원이 배분된다는 의미에서 시장은 꽤나 효율적인 것 같다.
다른 한편 사람들은 흔히 일한 만큼 번다 , 시장은 생산성이 높은 자를 보상한다고도 말해진다. 시장에서 소득과 재산이 사람에게 분포되는 과정을 분배라고 말해진다. 시장은 과연 공정하고 정의롭게 재산과 소득 또는 자원을 분배할까?
아무튼 배분과 분배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생태경제학 입문(http://www.eoearth.org/article/An_Introduction_to_Ecological_Economics:_Chapter_3
)을 보면
“배분(Allocation)은 대안적 제품 사용들 사이에서의 자원 흐름의 상대적 분할를 가리킨다-얼나마 많은 것이 차의 생산, 구두 생산, 쟁기 생산으로 가야 하는가? 좋은 배분이란 효율적인 것 즉 개인들의 지불 능력에 의해 가중된 개인 선호들에 부응하여 제품의 최종 용도들 사이에 자원들을 배분하는 것이다. 효율적인 배분을 가져오는 정책 도구는 경쟁 시장에서의 수요 공급에 의해 결정된 상대적 가격들이다.
분배(Distribution)는 최종 재화들과 서비스들에 구체화 된 대안적 사람들 사이에서의 자원 흐름의 상대적 분할이다. 얼마나 많은 것이 당신에게, 나에게 다른 사람들에게 그리고 미래 세대로 가는가? 좋은 분배란 정의롭거나 공정한 것 또는 최소한 불평등 정도가 받아들여질 수 있는 범위 내에 재한 된 것을 가리킨다. 더 공정한 분배를 가져오는 정책 도구는 세금이나 복지 지급과 같은 이전(transfers)이다. ”
분명히 배분과 분배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시장은 가격을 통하여 효율적으로 자원들을 배분한다. 그렇지만 과연 시장은 공정하게 분배도 하는 것일까
국부론의 저자인 아담스미스는 분배의 공정성에 관한 의문도 제기하였다.
국부론(1776)을 출간하기 10여년 즈음인 1762-1763에, 강의 중간에 아담스미스는 옆길로 새어 나갔다.
“불쌍한 농장 노동자는 토양과 계절의 모든 불편함과 싸워야 한다. 계속적으로 무자비한 날씨에 노출되고 동시에 가장 가혹한 노동을 해야 한다. 그래서 사회의 모든 틀을 떠받치고 나머지 사람들의 편리함과 용이함의 수단을 제공하는 바로 그는 그 몫이 아주 작고 이름도 없이 죽어간다. ”
이것은 오늘날 농장일꾼 역설(Farmworker Paradox)으로 알려져 있다. 즉 인간 삶에서 가장 필수적인 제품들을 공급하는 자들이 가장 적은 보상을 받는 현상을 가리킨다. ( M.Perelman , myth of markets. http://oae.sagepub.com/content/16/2/168.abstract )
계급들 사이의 분배의 문제는 고전파경제학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들 중의 하나였지만, 신고전파경제학에서는 분배의 문제는 배분의 문제 아래 포섭되었다. 여기에는 존 베이츠 클라크 ( http://en.wikipedia.org/wiki/John_Bates_Clark )보상의 한계 생산성 이론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2가지 가정들
그의 책 재산의 분포(1899)에서 클라크는 이 새롭게 발견된 생산용소들을 사용하여 분배에 대한 대안적 이론을 제안하였다. 그 이론은 소득과 생산 사이의 2단계 수리적 연계를 가정한다. 첫째는 .‘생산 함수’의 존재를 주장한다. 아웃풋의 수준은 양화 가능한 ‘생산요소들’의 함수로서 각 요소는 각자 생산에 기여한다. 이 주장은 노동, 토지 그리고 자본이 관찰가능하고 측정 가능함을 전제한다.
생산은 각 요소의 10, 20 그리고 15단위를 각자 사용하고 ; 이 요소들이 상호작용하는 방식도 명백하여 그것들이 각자가 생산에 기여하는 바를 분리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 예를 들어 노동은 40%, 토지는15% 그리고 자본재는 25% 등 각자의 기여한 몫을 알 수 있다고 가정한다.
2번째 단계는 생산함수를 사용하여 소득의 분배(분포)를 설명한다. 클라크는 완전경쟁 조건들 하에서 , 생산요소들의 소득은 그들의 공헌들 즉 한계 공헌도에 비례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임금은 생산에 추가된 마지막 노동자의 생산 공헌에 같고, 지대는 토지의 마지막 헥타르의 공헌과 같고 , 이윤율은 자본의 마지막 단위의 공헌과 같다)
클라크는 자본은 전혀 기생적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노동과 마찬가지로, 자본도 자신의 한계 생산성과 같은 소득을 받는다. 소득이 생산 공헌도에 비례하므로 , 자본가들은 그들의 자본소유를 통해서 노동자들보다 훨씬 더 생산적이다.
한계 생산성 이론 덕분에 신고전파 경제학자들은 경제를 탈-정치화 하는 자유주의적 프로젝트를 완성할 수 있었다. 고전파 경제학자들은 주로 웰빙과 분배(분포)에 관심이 있었다. 생산은 이 목적을 위한 하나의 수단에 불과했다. 클라크는 이것의 순서를 바꾸는데 기여했다. 분배는 생산의 부차적 결과였다. 그 이후로 소득 불평등의 원인들은 경제학에서 변두리로 밀려난 주제가 되었다.
사실상, 클라크와 그의 동료들은 경제를 탈-정치화 했을 분만 아니라. ‘탈-계급화’ 했다. 노동자들, 자본가들, 임대인들과 국가 대신에 . 이제는 추상적인 개인들 – 하루는 노동자가 되었다가 다음 날에는 자본가 그리고 그 다음날에는 자발적 실업자가 되는 ‘행위자들’로 경제가 채워지게 되었다. 이 개인들은 사회에 살지 않고 ‘경제 ’에 살았다. 그들의 유일한 목표는 소비에서 최대의 쾌락을 얻고 노동의 고통을 최소화 하는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 사회는 파레토 최적화라는 집합적 오르가즘에 도달하는 것을 항상 방해하는 외적이고 상당히 비합리적인 권역이다. 그래서 한계 생산성 이론은 직업적 경제학자들에게 빠르게 승인되었다.
역사적 맥락에서의 한계 생산성 이론
클라크의 분배 이론은 그 이론이 발전되었던 시대의 현실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다; 그 이론이 가정한 조건들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자유주의 이론에 따르면, 개인 소비자들은 그들이 바꿀 수 없는 생산 곡선에 직면하고, 개별 생산자들은 그들이 통제할 수 없는 수요 곡선에 직면한다. 그렇지만, 20세기 초가 되자, 독립적인 수요와 공급이라는 가정은 더 이상 성립하지 않았다. 첫째, 독과점들이 ‘자유’ 경쟁을 대체했다. 독과점 시장에서는 판매자들은 상호의존적이 된다. 둘째, 19세기 말이 되자, 판매자들과 구매자들 사이의 비대칭이 뚜렷해졌다. 개별적 소비자들은 시장 조건들을 변경하는데 무력했지만, 거대 기업들은 훨씬 더 힘이 있었다. 수요함수는 그 회사의 투자와 가격 전략의 일환으로서 형성되고 영향을 받았다.
3번째로 , 큰 정부와 적극적인 정부의 경제정책의 발달이 있었다.
비록 클라크의 분배 이론은 현실과는 동떨어졌지만, 그것은 바로 그 현실을 감추고 조작하는데 아주 유용하였다. 그 이론은 큰 정부와 대기업들에 의한 엄청난 힘을 무시하고 완전경쟁에 대한 신념을 심어주는데 일조하였다. 독과점들이 상호의존적이고 소비자들의 입맛을 조작하고 자신들의 의사를 강요한다는 사실을 감추는데 일조하였다.
존 디 록펠러는 $4500만를 기부하여 시카고 세례 대학(the Baptist University of Chicago)을 세웠다. 나중에 시카고 대학은 신고전파 경제학의 요새가 되었다. 록펠러 자신의 평가에 따르면 ‘내가 한 투자 중에서 최고였다.’
클라크의 논리에 있어서 가장 큰 문제는 이미 20세기 초에 윅셀에 의해 확인되었다. 그것은 바로 자본의 ‘양(quantity) ’이다. 주어진 자본은 보통 상이한 타입의 자본재들과 연관된다. 이러한 이질성 때문에 자본재들은 그들 자신의 ‘자연적인’ 단위들로 합산될 수 없다. 항공기 부품을 생산하는 기계를 비스킷을 만드는 다른 기계에 ‘더하는’ 유일한 방법은 돈으로 측정된 가치들을 합하는 것이다. 자본재의 화폐 가치는 그것의 미래 이윤의 현재 가치이다.
우리의 목적이 자본의 화폐 가치를 측정하느 것이면 , 이 방법은 훌륭하다. 문제는 그러한 가치를 자본의 ‘물리적’ 양과 동치인 것으로 해석할 때 발생한다.
순환논법
이자율이 5%이고, 주어진 기계가 매년 $100만의 이윤을 낼 것으로 기대된다고 하자. 현재 가치 원리에 따르면 , 그 기계는 $2000만(=100만/0.05) 의 물리적 양을 갖는다. 그러나 만일 기대 이윤이 $120만으로 높아지면? 그러면 현재가치는 $2400만이 된다. 그러므로 그 기계는 고정된 한 가지 자본 ‘량’을 갖지 않는다!
클라크의 분배 생산성이론은 자본에 관한 순환논리에 입각해 있다: 주어진 자본량의 한계 생산성에 의해 이윤의 크기를 설명하는 한편, 그 자본량은 바로 그 이윤의 함수이다! 클라크는 그가 증명하길 바라는 것을 가정했다.
1960년 “상품에 의한 상품 생산”에서 스라파는 ‘자본량’(‘quantity of capital’)은 순환 논법임을 증명했다.
스라파는 그런 자본량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가정하여 그것이 자기-모순이 됨을 보였다. 그래서 자본의 ‘물리적 ’ 양은 허구이고 그것의 생산적 공헌도는 가격과 분배(클라크의 이론이 설명하려고 했던 바로 그것)를 모르면 측정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스라파의 공격은 자본량과 이자율 간에 존재한다고 주장되던 연관성에 주로 향해졌다.
신고전파 경제학자들은 이질적인 자본재들을 직접적으로 자본으로 함산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자율을 보면 간접적으로 합산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 논리는 다음과 같다:다른 모든 것이 같다고 하면, 이자율이 높을수록, 자본은 노동 대비 더 비싸지고 , 따라서 노동에 비해 덜 고용될 것이다. 이 관점에 따르면 , 한 생산적 과정의 ‘자본 강도’(=자본량/노동량)는 이자율과 음의 관계가 있다. 물론 그 관계는 유일해야 한다. 각 ‘자본 강도’는 오직 하나의 이자율과 연관된다. 그렇지 않으면 , 똑같은 자본이 여러 가지 ‘강도’를 갖게 된다. 그렇지만 스라파는 , 신고전파 이론과는 반대로, 자본 강도가 이자율과 1-1 관계를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예를 들어, 2가지 기술이 있는 경제를 생각하자. 과정 X는 자본 집약적이고, 과정 Y 는 노동집약적이다. 이자율이 높아지면 자본은 노동에 비해 비싸지고 , 신고전파 이론에 따르면 , 자본가들은 X에서 Y로 생산을 이동한다. 그렇지만 , 이자율이 계속 높아지면 , 과정 Y 가 더 비싸지면서 자본가들은 X로 원위치 할 수가 있다. 원위치는 예외가 아니라 대세이다. 그 결과는 논리적 모순이다. 이자율이 자본 강도와 역의 관계이면 , X는 자본 집약적(낮은 이자율에서)이기도 하고 노동집약적(이자율이 높을 때)이기도 하다. 다른 말로 하면 똑같은 자본재들이 상이한 자본‘량들’을 나타낸다. 스라파파의 연구의 결과로 이윤이 설명되어야 할 것으로 남았을 뿐만이 아니라 자본재에게도 고정된 ‘량’이 없게 되었다.
캠브리지 자본 논쟁 (http://en.wikipedia.org/wiki/Cambridge_controversy )
로빈슨과 스라파가 가르쳤던 캠브리지 대학과 많은 신고전파 경제학자들의 본거지였던 매사추세츠 대학 간에 이 자본의 양을 둘러싼 논쟁이 1960년대에 전개되었다. 결국 폴사무엘슨이 이끄는 신고전파 경제학자들은 문제가 있음을 시인하고 클라크의 자본에 대한 신고전파 정의를 문자 그대로가 아니라 하나의 ‘우화’로 취급할 것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자본의 물리적 양이 없으면 생산함수라는 관념도 파괴된다. 그러면 신고전파의 공급곡선도 무효가 된다. 공급곡선이 없으면 , 균형이라는 관념도 없게 된다. 균형이 없으면 , 가격과 양들도 없다.
이 문제에 대한 해법으로, 신고전파 경제학 교과서들은 마치 캠브리지 논쟁이 전혀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자본을 ‘측정 가능한’ 것으로 묘사한다. 신고전파 이론은 사상누각에 기초한다. 자본이 물질적 실체로서 자기 자신의 생산성을 갖는 측정 가능한 물리적 단위라는 관념은 기초가 없음이 판명이 났다. 그래서 신고전파 이론은 가격들과 생산의 구조를 설명할 수 없을 뿐만이 아니라, 그러한 구조에서 나오는 소득의 분배도 설명하지 못한다.
(자본량의 측정의 역사에 관해서는 “capital as power” , http://dieoff.org/_Economics/Nitzan%20and%20Bichler%20-%20Capital%20As%20Power.pdf 참조)
다시 농장 일꾼 역설로 돌아가자.
위에서 보았듯이 자본의 양을 결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자본의 생산성 측정은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생산성을 측정하지 못하는 다른 이유도 있다. 농장일꾼이 사무실에서 편하게 일하는 노동자들보다 왜 더 적은 보상을 받는지를 물으면 경제학자들은 사무실노동자들의 생산성이 더 높기 때문이라고 한다. 생산성이 더 높은지 어떻게 아느냐고 질문하면 그들은 임금이 더 높은 것을 보면 생산성이 더 높음에 틀림없다고 대답한다!
경제학자들이 이런 대답을 하는 이유는 물론 생산성 측정이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자본의 양을 측정하지 못하는 이유도 있지만, 아담스미스가 제시한 분업에도 그 이유가 있다.
아담스미스는 2가지 타입의 분업을 제시하였다. 하나는 공장 내 분업이고 다른 하나는 기업 간 분업이다. 분업이 존재한다는 것은 하나의 완제품을 만드는데 부품들이 많고 이 부품들은 다른 기업들에서 생산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많은 부품들의 생산성을 알길이 없음으로 완제품의 생산성도 알 길이 없다.
그러므로 배분의 효율성이 분배의 공정성을 함축하지 않는다. 즉 이론은 시장에서 배분이 효율적으로 이루어졌다고 해도 분배가 공정하게 이루어지는지 여부에 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현실에서 분배가 공정하게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보자.
1917- 2005년 사이 미국 최상위 가구 1%. 0.1%, 0.01%의 세금 공제 이전 소득의 비중
(http://en.wikipedia.org/wiki/File:Share_top_1_percent.jpg )
http://en.wikipedia.org/wiki/Wealth_inequality_in_the_United_States
경제학자들의 한계 생산성 이론에 따르면 미국의 최상위 1% 부자들은 1920년대-30년대에 생산성이 극도로 높았다가 미국이 가장 번영하던 1960-1970년대에 가장 생산성이 낮았다가 최근에 다시 엄청 높아졌다.
그렇지만 다른 설명도 있다.
위키피디아의 미국 소득 불평등(http://en.wikipedia.org/wiki/Wealth_inequality_in_the_United_States) 기사를 보면
“재산 불평등의 원인들
금융 자원들
돈 배분
부자들의 높은 저축과 자산 축적
부자 소유 자산에 대한 더 높은 수익률 (부자들은 전문지식을 가질 수 있고, 그들의 저축에 대한 수수료나 다른 요금들은 작은 투자 대비 더 적다)
부자들에 대한 낮은 신용 비용과 신용 제약들. 낮은 이율의 신용에 대해 접근가능하기 때문에 이윤 수준도 높아지고 투자 기회도 넓어진다.
6. 인플레
본질적으로, 부자들은 돈이 더 많은 돈을 벌게 하여 주는 더 큰 금융 기회들을 갖는다. 주식시장 또는 뮤추얼 펀드로부터의 어닝들은 재투자되어 더 큰 수익을 가져온다. 시간이 지나면서, 투자되는 금액은 점점 더 커진다. 그렇지만, 부자가 아닌 사람들은 그들의 기회들을 증진하고 그들의 경제적 위치를 개선할 금융 자원들을 갖고 있지 못하다. 빚을 갚고 난 후에 가난한 가족들은 나머지 소득을 부를 생산하지 못하고 시간이 가면서 감가되는 그런 품목들에 지출해야 한다. 홑부모 가정의 62%는 저축이나 금융 자산이 전혀 없다. 빚을 지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은 재산을 축적할 기회를 갖지 못하고 따라서 생활 조건들을 개선하지도 못한다.
부자에게도 빈자에게도 , 축적 또는 빚은 다음 세대로 이어진다. 부자들은 그들의 돈으로 더 큰 수익을 창출하고 빈자들은 수익을 얻거나 빚을 갚을 저축이 없다. 부유한 부모들은 자식들이 더 많은 재산을 모을 수 있는 재산을 물려준다. 반면에 , 빈자들은 그들의 자식들에게 물려줄 재산이 거의 없거나 전혀 없다.
금융 자원들이 많기 때문에 부자들은 그들의 돈을 분산 투자할 수 있다. 반면에 부자가 아닌 사람들은 그들의 돈을 은행 예금 계좌나 주택 소유에 사용한다. ”
부자들은 투자할 금융 자산을 갖고 있고 , 이것이 여러 번 투자되면 그 금액은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이것은 “복리의 기적”(http://www.kiplinger.com/columns/starting/archive/2007/st1107.htm )이라고 불린다. 수학적으로는 이것은 지수함수 증가라고 불린다.
연 20% 복리 이율로 $1000 투자의 효과
http://en.wikipedia.org/wiki/File:Compound_Interest_with_Varying_Frequencies.svg
10년 후에 5배 정도로 늘어남을 주목하라.
반면에 투자할 여력이 없는 자는 매년 제자리걸음을 하게 된다. 그 결과 시간이 가면 갈수록 부자와 빈자의 격차는 가파르게 벌어진다. 복리의 기적이 8번째 세계 불가사의로 불리는 것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이러한 분배의 불공정성을 시정하기 위해 생태경제학 입문의 저자들(Costanza &Daly)은 우선순위를 규모, 분배 그리고 배분 순서로 정하고 사회적 합의에 따라 규모와 분배를 결정한 후에야 가격에 의해 시장이 자원을 배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스콜라 경제학자들이 배분 하에 분배를 포함하려고 시도했다는 것은 시사적이다. 이것이 중세의 유명한 “공정 가격” 독트린이다. 오늘날의 경제학자들은 배분과 분배를 분리된 것으로 보고 가격들은 오직 효율성에만 봉사하도록 놔두고 , 정의는 별도의 이전(transfers) 정책으로 달성할 것을 주장한다. 문제는 분배를 배분 아래 포섭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 먼저 지속가능한 규모의 생태적인 한계, 둘째, 재산권과 이전들의 시스템을 사용하여 공정하고 정의로운 자원 분배를 확립 한 후에야 셋째, 자원들을 효율적으로 배분하는데 사용될 수 있는 시장 –기반 메커니즘들을 확립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