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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월남인들의 반공전위대 서북청년단

뉴 턴 2012. 10. 17. 11:08

해방 후 월남인들의 반공전위대 서북청년단 


과거 일제시대 대동아공영을 외치며  스스로 일본인이 되고자 했던 부류들이 있다



바로 일제앞잡이들이다  봉건조선의 정치관료와 그후에 새롭게 형성된 일본제국 자본가들이었다



이런 부류들에게 애국,민족애란  그자신과 가족들의 부와 명예를 획득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나와 내가족들 맛난 것 먹고 좋은 집에 많은 재산을 두고 사는 것이다


그래서 과거 봉건조선에서는 임금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피지배계급인 상인 머슴들에게 상전으로 군림하다 
러일전쟁 중일전쟁에서 연달아 이긴 신흥자본제국 일제의 대동아제국을 등에 엎고 일본 찬양을 외쳤던 것이다
1920년 이전에 벌써 비행기를 자체 생산하고 최강이라고 알려졌던 러시아해군을 이겼던 일본이 그들에게는 이세상 최고권력을 가진 나라로 보였을 것이다

그래서 1940년대부터 영국,프랑스,미국 등의 서방제국과 일본제국이 아시아라는 먹잇감을 놓고 으르릉거리다 끝내는 전쟁을 일으켰을 때 영국미국타도박멸을 외쳤던 일본의 방침에 따라 일제앞잡이들도 영미박멸을 따라 외쳤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의 일제앞잡이들의 바램과는 달리 영원히 지지 않을 것 같았던 일본제국은 서방제국과 소련에 의해 무너지고 말았다
어제까지 기모노를 입고 영국미국타도를 외치며 영원무궁 일본을 믿었고 스스로를 일본인이라고 생각했던 일제앞잡이들은 미군이 이땅에 들어오자 곧 미국만세를 외치며 미국앞잡이로 재빠르게 변신했던 것이다



이들이 바로 최남선,이화란(이화여대총장),백선엽백인엽형제,정일권,송요찬 등 대다수가 대한민국 건국의 주역이 된다
그래서 한국 땅에서 일제앞잡이 처단은 곧 죽음의 다른 말로 통했다
감히 오성장군,대통령,국회의원,대학총장,경찰총장에게 일제앞잡이의 전력을 물어 본 수 없었다
오히려 이들이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분들을 모조리 가두고 죽여버렸던 것이다

구소련 세력의 한반도 영향력을 최소화하기 위해 서두러 38선을 긋게 되고 나라는 두동강이 나고 말았고 이때 북한정권의 개혁조치에 불만을 품은 자들이 대거 남한행을 택하게 된다
일제앞잡이,일제신흥자본가,기독교인  등이다
이들이 바로 서북청년단을 결성해 대한민국 영역 내에서 초법적 살인면허를 가지고 빨갱이 사냥을 했던 것이다

황해도,함경도,평안도 월남민들인데 이승만 정권의 반공전위대이자 미국선봉대였던 것이다
이들은 따로 월급이 없었다  주로 태극기 강매를 통해 생활비를 벌었고 노동자 파업깨기에 나선 후 이승만의 격려금을 나눠 갖는 식이었다

남한 일제앞잡이들에 비해 이들은 몸을 사리지 않고 시위,파업 현장에 뛰어들어 백주대낮에 사람 한 둘 죽이는 걸 우습게 여겼다고 하며 자기네끼리도 몇 명이나 죽였네 하며 자랑처럼 말하고 다녔다고 한다

남한 반공청년들은 친인척 학교선후배,고향선후배 관계로 얽혀 시위자들을 함부러 죽일 수 없었지만 월남반공청년들은 남쪽에 대부분 연고가 없었기에 마음대로 닥치는 대로 죽이고 다닐 수 있었다

사실 이들과 남한 비타협민족주의자 및 사회주의자들은 원한을 살 이유가 조금도 없었다

같은 나라에 살았다고는 하지만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었기에 마주치며 불편한 관계를 가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들은 김일성 정권에게 빼앗긴 기득권에 이를 갈며 엉뚱한 남한땅에서 분풀이를 한 것이다

월남 초기에는 주로 서울의 외곽 지역인 지금의 강남 일대에 천막을 쳐 놓고 100명 단위로 집단 거주하며 이승만의 명령에 따라 진보단체와 좌익단체의 파업,시위에 동원되어 이들에게 공포를 심어주기 위해 마음껏 폭력을 휘두르다 47년 부터는 제주도에 내려가 태극기 강매행위와 시위,집회 파괴자로 나서 이들에게 또다시 엄청난 폭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특히 일본인이 남기고 간 재산인 적산을 빼앗기 위해 1층 상점의 2층에 구멍을 뚫어 오줌을 누고 처녀들에게는 강간까지 하는 등 겁을 줘 적산을 빼앗었던 것이다

제주도 사람들에게 있어 이들은 이가 갈리는 사람들이었다

48년 4월부터 유격투쟁이 본격화되자 산으로 올라 간 4~500여 명의 빨치산들의 가족과 친구 친인척이 표적이 되었지만 빨치산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람들고 단지 빨치산과 같은 동네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혹은 단순히 자신들에게 접대를 제대로 하지 않는다는 이유를 들어 총으로 사람 죽이는 걸 밥 먹듯이 했던 것이다

 

솔직히 이들의 행위는 차마 입에 담기에도 어렵고 또 글로 표현하기에도 그 죄악상을 낫낫히 싣지 못한다

유치장에 잡혀 온 칠순 노인이 보는 앞에서 그 며느리를 발가 벗겨 가시가 박힌 나무몽둥으로 온몸을 사정없이 두둘겨 패는가 하면 며느리와 시아버지에게 성관계를 시키기도 하며 말을 듣지 않을 때면 두둘려 패 죽이기가 일쑤였다

 

오손도손 아침밥을 먹고 있는 집에 들이닥쳐 노인과 어린애 며느리를 총으로 쏴 죽이는가 하면 무전으로 미군 폭격기글 요청해 온 마을을 불바다로 만들기도 했다

서북청년단은 마을마다 들이닥쳐 시키는대로만 하면 살려 준다고 사람들을 집밖으로 나오게 한 다음 언덕 위에 기관총을 걸어 놓고 그대로 난사해 죽이기도 했다

 

제주 4.3 당시 이북 출신 서북청년단과 육지경찰,미군에게 죽은 숫자만 5만 명 넘는다고 한다 

 

반공,반북은 개인의 양심적 자유에 따라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반대급부에 따른 한국 진보운동의 파괴자로 행동하는 것은 반드시 짚고 넘어 갈 부분이다

 

제주4.3항쟁의 직접적 원인의 하나로 꼽히고 있는 서북청년단. 제주4.3진상규명 작업이 이뤄지면서 4.3과정에서 서북청년단의 만행이나 잔혹성은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서북청년단이 어떻게 4.3에 연관되었는지, 구체적으로는 어떤 역할과 행동을 보였는지에 대한 연구작업은 미진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가운데, 11일 제주4.3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도민연대(공동대표 김평담 김용범 윤춘광 양동윤)가 '서북청년단의 실체를 규명한다'라는 주제로 4.3도민토론회를 개최해 눈길을 끌었다.

  
▲ 4.3'서북청년단의 실체를 규명한다' 토론회에서 양동윤 4.3도민연대 공동대표가 첫 주제발표자의 내용에 대한 토론을 진행하고 있다. <미디어제주>
  
▲ 4.3도민연대가 주최한 토론회 '서북청년단의 실체를 규명한다'. <미디어제주>
  
▲ 4.3도민연대가 주최한 토론회 '서북청년단의 실체를 규명한다'. <미디어제주>

서북청년단의 실체에 대한 규명을 위한 토론회가 마련되기는 제주지역에서는 물론, 전국적으로 처음 있는 일로 평가된다.

이날 토론회에서는 서북청년단과 관련한 내용을 갖고 학위논문을 준비했던 정종식씨(건국대 역사교육학 석사)와 김평선씨(제주대 정치외교학과 박사과정) 2명이 주제발표자로 나섰다.

#"서북청년단 물건 구매에 냉담한 주민들에겐 '빨갱이' 매도 일쑤"

첫 발표자로 나선 정종식씨는 '서북청년단의 결성과 활동'이란 주제로 결성과정, 4.3항쟁에 있어서의 서북청년단의 활동을 중심으로 해 정리해 발표했다.

"서북청년단은 해방 이후 북한의 친일잔재 청산과 체제개혁의 희생자가 되어 월남한 이북 5도의 청년들이 결성한 우익 반공청년단체입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초기 폭력적이고 극우적인 성향을 띠며, 반공세력의 선봉 역할을 수행해왔으며, 제주4.3항쟁의 탄압세력 및, 김구 암살사건과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서북청년단은 정식명칭은 '서북청년회'인데 '서북청년단'이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불리었고 줄여서 서청이라고도 불리었습니다."

  
▲ 첫 주제발표자인 정종식씨(건국대 역사교육 석사). <미디어제주>
서북청년단의 결성과정, 그리고 참여한 사람들의 특징, 그리고 결성 후 전국적 활동내용 등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한 그는 4.3항쟁 당시 서북청년단의 '만행'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서청 제주도 지부가 정식으로 발족된 것은 1947년 11월2일이었습니다. 위원장에 장동춘이 선출되었는데, 발족 훨씬 이전부터 적지 않은 서청단원들이 제주에 들어와 민심을 자극시키고 있었습니다."

그는 "서북청년단 단원 가운데에는 이북에서 급히 도망쳐 나온 연유로 빈털터리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제주에서 무전취식을 일삼으며, 민가에 가서 쌀과 돈을 강요했고 관공서에 가서도 '국민배급'을 달라고 떼를 쓰고 또 태극기나 이승만 사진 등을 들고 다니며 반 강압적으로 파는 단원들도 있었습니다. 4.3항쟁이 일어난 후 성산포 등지에서는 물건 구매에 냉담했던 주민들이 '빨갱이'로 몰려 억울하게 목숨을 잃는 사례가 있었다는 증언도 있습니다."

그의 발표자료에 따르면 4.3발발 이전까지 제주에 파견된 서청단원의 수는 제주읍 300명, 각 면마다 40-50명씩 총 760명으로 추정된다.

1947년 제주도에서 총선거를 반대하는 폭동이 일어나자 조병옥 경무부장의 요청으로 서청은 500명의 대원들을 '경찰'로 임관하여 김태일 경무부 경무과장의 지휘하에 현지 경찰전투대에 편입돼 토벌전에 나섰다고 그는 설명했다.

그리고 여순사건 직후 1948년 11-12월 사이에 서청단원은 최소한 1000명 이상이 경찰이나 경비대 옷을 입고 추가 투입된 것으로 파악된다고 설명했다.

"3.1시위 이후 갑작스러운 정부군의 증강으로, 침체에 빠져있던 제주도 경제는 새로운 경찰.우익 청년단들을 부양해야 하게 되어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경찰의 봉급은 너무 적었기 때문에, 여러가지 명목으로 뇌물을 받아 이를 보충해야 했습니다. 서북청년단은 정기적인 봉급이 없었고 완전히 빈손으로 살아가야 했습니다. 공공질서가 확립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이들은 뇌물수수, 공갈, 사기 등을 거리낌없이 일삼았습니다. 경찰과 우익들은 반항하는 섬주민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했습니다."

#"처녀들을 강제로 아내로 삼는 행위도 다반사"

그는 1947년 미군 정보보고서에는 제주에서 자행한 서청의 테러행위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며 그 내용을 설명했다.

"서북청년단 순회 집회 때 저질러지는 제주도 주민에 대한 계속되는 테러에 관해 서청 관계자들은 자신들의 조직원이 더 이상 제주에서 테러사건을 유발시키지 않도록 하겠다고 11월18일 CIC에 사과했다. 우익들은 서청의 자금모금 캠페인을 벌임에 있어서 테러에 의존해 왔다. 서북청년단 제주도 단장이 지난 주 제주 CIC에 '제주도는 조선의 작은 모스크바'라고 말했다. 그는 이같은 자신의 주장을 CIC에 증명하려고 애썼다."

그는 "무자비한 테러와 탄압으로 도민들의 감정이 격하됐다"며 "경찰과 서청의 테러가 심해지면서, 젊은이들은 낮에는 산으로 올라갔다가 밤에만 마을로 내려오는 경우가 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정씨는 "서청은 비록 '반공'이라는 명분을 내걸고 제주에 투입되었지만 이들의 행위는 오히려 '빨갱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였다"며 "무차별적으로 사람을 죽이다 보니, 우익계통의 사람들도 상당히 포함돼 있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 4.3도민연대가 주최한 토론회 '서북청년단의 실체를 규명한다'. <미디어제주>
서북청년단의 만행에 대한 그의 설명은 끊이지 않았다.

"빈곤한 상황이 잔혹한 테러와 민간인에 대한 폭력을 야기한 원으로 유추된다. 이들의 명목은 '반공'이었지만  좌익 뿐 아니라 민간인들 심지어 우익 인사들에게도 무차별적인 폭력을 휘둘러 금품을 갈취하였으며, 처녀들을 강제로 아내로 삼는 행위가 다반사였다."

그는 서북청년단의 '잔혹성'이 컸던 이유에 대해서는 경제적 궁핍함을 들었다.

"군경이 아닌 청년단원의 신분으로 파견된 이들에게는 월급도 주어지지 않았고, 모든 의식주 활동을 침탈로만 해결했다. 이런 이유로 이들의 행위가 정당화되지는 않겠지만, 모든 것을 빼앗기고 홀홀단신으로 남한 사회 한가운데 버려진 처지에 처한 이들의 빈곤한 경제사정과 피해의식은 그들의 행위를 더욱 극단적이고, 반인륜적인 모습으로 이끌었을 것임은 쉽게 추측해 볼 수 있을 겁니다."

#"서북청년단의 폭력은 무장봉기 집단과 제주도민의 사회적 불만 매개 역할"

두번째 주제발표로 나선 김평선씨는 '서북청년단의 폭력동기 분석'을 통해 4.3 전개과정에서 서북청년들이 왜 폭력성의 원인에 대한 연구결과를 제시했다.

김씨 역시 앞서 주제발표한 정씨와 마찬가지로 서북청년단의 폭력의 원인을 경제적 문제로 유추했다.

  
▲ 김평선씨(제주대 정치외교학과 박사과정). <미디어제주>

그는 "활동자금을 모으기 위한 서북청년단은 강매, 강제모금을 취했으며, 관공서 조급문제, 심지어 인사문제에까지도 개입했다"며 "이러한 과정에서 폭력이 사용되었으며 서북청년단의 폭력은 미군정 CIC에도 관심사항이 되었다"고 말했다.

"무릉리에서 서북청년 경찰대에 의해 박행구가 구타당하고 총살당하는 일이 발생하기에 이르렀다. 서북청년단과 경찰의 고문, 구타, 살해 등의 강도높은 폭력은 남로당의 핵심 지도부들의 원성을 가져왔다. 서북청년단의 강제모금과 관공서 인사문제 개입과 사적 처벌 등의 폭력남용은 제주도민의 불만을 초래시켰다. 오히려 서북청년단의 폭력은 무장봉기 집단과 제주도민의 미군정에 대한 경제적, 사회적 불만을 매기하는 역할을 했다."

4.3무장대에 대한 정부의 강경 진압작전 등의 요인도 서북청년단의 폭력에 영향을 미쳤다고도 분석했다. 그는 "서북청년단은 군사시설 보호와 정보수집 등의 활동을 하는 등 군.경과 협력관계에 있었다"며 "서북청년단은 민간인 복장을 하고 무장대 진영에 침투하거나 마을에 밀고자를 두어 남로당원과 무장대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다"고 말했다.

또 "색출 프로그램이 가동되기 시작하면서 서북청년단, 서북청년으로 구성된 특별중대, 서북청년단 출신의 경찰은 혐의자를 연행하거나 직접 학살했다"며 "그러나 이러한 폭력은 서북청년단에게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군과 경찰에도 나타나고 있다"고 설명했다.

#"가해자에 대한 논의를 이끌고 있다는데 큰 의미있는 토론"

주제발표 후, 박찬식 제주4.3연구소장의 사회로 진행된 토론회에서는 제주4.3유족청년회 등을 지내며 4.3진상규명 활동에 많은 활동을 했던 오영훈 제주특별자치도의회 의원, 그리고 이창수 새사회연대 대표와 김종혁 4.3도민연대 정책위원장이 토론자로 나서 이에대해 의견을 피력했다.

  
▲ '서북청년단의 실체를 규명한다' 토론회 모습. 사진 오른쪽부터 이창수 새사회연대 대표, 김평선 주제발표자, 박찬식 제주4.3연구소장, 오영훈 제주특별자치도의회 의원, 김종혁 4.3도민연대 정책위원장. <미디어제주>
오영훈 의원은 "오늘 토론회는 그동안 논의되지 못했던 가해자에 대한 논의를 이끌고 있다는데에 큰 의미가 있다고 본다"며 "또한 이는 4.3의 진상규명 작업이 미완이라는 것을 말해주기도 한다"고 말했다.

오 의원은 "이러한 추가적인 진상규명 활동을 통해 4.3의 화해, 상생의 정신이 우리 사회에 구현하는데 기여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종혁 4.3도민연대 정책위원장은 "오늘 나온 내용을 토대로 해 진상규명의 과정과 역사적 사실기반, 그리고 평가가치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통해 앞으로 진실을 밝혀내는 일이 중요하다"며 "이것이 진정한 진상규명의 해법"이라고 강조했다.

토론이 끝난 후에는 한석지 제주대 교수의 사회로 방청객들이 참여하는 종합토론이 열렸다.

이날 행사를 주관한 양동윤 4.3도민연대 공동대표는 ""서북청년단의 실체를 규명하는 토론회는 아마 전국적으로도 처음 있는 일일 것"이라며 "오늘 논의는 서북청년단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그들의 행위가 무슨 이유에 의해서였는지 인식을 넓히는 계기가 될 것"이라며 "또한 이런 자리를 통해서 역사적 진실을 밝혀 나가고 완전한 4.3해결에 더욱 근절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미디어제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