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친일파

서북청년단의 만행 4,3의 恨 (원한을 품다 한)

뉴 턴 2012. 10. 17. 11:14

서북청년단의 만행 4,3의 恨 (원한을 품다  한) 



친일파는 해방후 '반공주의자'로 변신해 이미 경찰과 정치권을 비롯해 사회 구석구석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이승만은 친일파를 비호했다. 


국내 정치기반이 취약한 이승만에게 친일파는 가장 큰 정치적 배경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미군정이 일제경찰을 옹호한 것과 같은 이유였다.


서북청년단의 만행은 제주도민들이 4·3을 이야기할 때 가장 흔히 듣는 이야기 중 하나이다. 서청의 만행은 4·3발발의 주요 한 원인으로 지적되기도 한다. 서청은 "우리는 이북에서 공산당에게 쫓겨 왔다. 빨갱이들은 모두 씨를 말려야 한다"고 공공연히 말했다.

당초 서청은 민간인 자격으로 제주도에 들어왔다. 처음엔 주로 엿장수를 하다가 점차 세력을 커지자 이승만의 사진과 태극기를 강 매했다.

4·3이 발발하자 서청은 경찰로, 또는 군인으로 옷을 바꿔 입었다. 과거에 이승만 사진과 태극기를 사지 않았던 사람들 은 총살됐다. 서청의 위세는 너무도 커서 제주출신은 경찰들도 꼼짝못했다.

 중문면 상예리의 강기주는 당시 제 주경찰청 고위간부인 강기천 총경의 동생이었다. 초토화작전이 막 시작되던 1948년 11월 중순께 서청이 상예리에 들이닥쳤다. 

모 두 죽을 위험에 놓였을 때 강기주는 "나는 강기천 총경의 동생입니다. 무고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서청은 "경찰간부면 다 냐. 이 새끼는 더 악질이다"며 그 자리에서 먼저 총살했다.

1948년 말 경비대총사령부는 제주주둔 토벌대를 9연대(연대장 송요찬)에서 2연대(연대장 함병선)로 교체했다. 2연대가 들어 오면서 서북청년단은 더욱 기승을 부렸다. 

이승만은 '사상이 건전한 여러분이 나서야 한다'며 서청의 제주파견을 앞장서 독려했다. 미 군 장교들 역시 이에 개입했다. 

연대 내에 서청으로만 구성된 '특별중대'가 편성될 정도였다. 서청 특별중대가 주둔했 던 성산포, 구좌면 월정리, 한림면 한림리에서는 비명소리가 그치지 않았고 연일 총살극이 벌어졌다. 

성산포의 속칭 '터진목'은 대표 적 학살터이다. 한 증언자는 "얼마나 끔찍했으면 그곳에서 보초서던 순경조차 충격을 받아 입이 삐뚤어졌다"며 "그 순경은 병을 고치 려 무당 불러 굿까지 했다"고 말했다.


그 날의 사연들은 너무도 처절해 상상력을 압도한다. 비슷한 증언을 들었으면서도 언제나 머리가 쭈삣 서고 소름이 돋는다. 단순히 총맞 아 죽은 희생은 이야기 거리도 되지 않을 정도이다.


애써 증언을 듣다가도 갑자기 가뿐 숨을 몰아쉬며 괴로워하는 연로한 증언자를 대 하면 은근히 걱정도 되고, '도대체 지금 내가 뭘하고 있는건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당시 국민학교 교사였던 홍경토 씨 (70)는 학교의 등사판이 없어지는 바람에 죽을 고비를 겪었다. 서청이 "폭도들 삐라제작을 위해 빼돌린게 분명하다"며 교사들을 잡 아들였기 때문이다. 홍 씨는 자신이 목숨을 구하게된 가슴아픈 사연을 이렇게 털어놨다.


서청이 이런 저런 구실을 댔지만 모두 무고한 사람들이 희생됐습니다. 난 주정공장 창고에 갇혔는데 내 옆에는 형도 있었습니다. 끌려 나가는 형의 발목을 한 번 만진게 마지막 인사가 됐습니다.


창고 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갇혀 있었는데 무자비한 구타와 함께 차 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장면들이 벌어졌습니다. 남녀를 불러내 성교를 강요했고 여자의 국부를 불로 지지기도 했습니다.


밤엔 그 냄 새로 잠을 못이룰 지경이었습니다. 내가 살아난 것은 전적으로 정아무개 선생 덕분입니다. 정 선생은 나의 약혼녀인데 한달만에 풀려나 와 보니 정 선생은 차아무개라는 서북청년단 간부와 결혼해 있더군요.


날 풀어주는 조건으로 자신을 겁탈하려던 서청원과 결혼한 겁니 다. 현재 불행하게 살고 있다는 소문만 듣고 있는데 지금도 정 선생 생각을 하면 가슴이 미어집니다"


이 밖에도 더 이상 차마 글로 표현키 어려운 참혹한 일들이 부지기수로 벌어졌다. 어떻게 문명사회에서 이런 일들이 공공연하게 자행 될 수 있었는가. 서청도 인간인데 갑자기 악의 화신이라도 됐다는 말인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졌을 때는 불가항력의 주민들을 학살하 고도 아무런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다는 말인가. 의문은 그치지 않는다. 어쩌면 이들도 역사의 희생자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집단 광 기는 그 자체로 연구 대상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누가 이들을 집단광기로 몰아넣었는가.


도대체 누가 사설단체인 서북청년단에 게 무기를 주어 학살극을 조장했는가. 이런 구조적인 문제를 살피는 것이 4·3진상규명의 열쇠라 할 것이다.


바로 이승만,조병옥 미군에 그 책임이 있다고 결론지었다.

1948년 8월 24일 체결된 한미군사안전잠정협정에 따라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은 전적으로

미군이 갖고 있었다. 

또한 미군은 제주에서 벌어졌던 학살극의 현장에 있었고 배후의 정점에서 작전에 개입했다.

이같은 사실들은 미군과 초토화작전을 불가분의 관계로 묶는다.

< 1950년 8월 20일 모슬포 경찰서에 예비검속된 344명 중 252명을 새벽 2시경과 5시경 2차에 걸쳐 밤중에 총살하고, 돌무더기와 함께 암매장 당하는 끔찍한 일이 발생했다. 
모슬포 주둔군 해병대 제3대대 대대장 김윤근 소령의 지휘에 의해 학살이 자행된 것이다.  >

<그리고 2001년 3월 28일, 한국전쟁 당시 섯알오름 양민학살은 모슬포 주둔 해병대

제3대대 대대장 김윤근(당시 소령)이 지휘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


48년 11월 20일 국회를 통과한 국가보안법

전날인 11월 19일 국회는 주한미군 계속주둔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정치권은 친일파 정국', '통일 정국'에서 급속히 '반공 정국'으로 변했다.


국가보안법의 경우 '일제 치안유지법의 재판이다', '이 법률을 발표하고 나면 안 걸릴 사람이 없을 것'이라는 등 소장파 의원들의 반대도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피를 한 포기 뽑다 보면 나락이 다칠 때도 있다. 그렇다고 피를 안 뽑을 수 있느냐'는

살벌한 논리에 밀렸다.

국가보안법이 정적(政敵)을 제거하는 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다는 우려는 곧 현실로 나타났다
이 법에 의한 첫 상징적 희생양은 소장파 의원들이었다. 소위 '국회프락치사건'에 걸려든 것이다.


조작임이 밝혀지고 있는 이 사건의 희생자들은 바로 반민법 제정과 반민특위 활동에 앞장섰고 국가보안법을 반대했던 의원들이었다.

바로 이런 분위기 속에서 탄생했다


"전후 점령군에 대하여 제주도에서와 같은 격렬한 대중적 저항이 분출된 일은 

지구상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제주4·3항쟁-대규모 민중학살의 진상 ◆ 시간 나시면 가보실곳

미군과 군경에 의한 민간인 학살



출처 : http://bbs2.agora.media.daum.net/gaia/do/kin/read?bbsId=K162&articleId=63100